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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 표류기>, 아직도 그들은 표류하고 있을까?MOVIE 2016. 1. 22. 01:12
김씨 표류기, 2009
Castaway On The Moon
감독: 이해준
출연: 정재영(남자 김씨), 정려원(여자 김씨)
한마디로 표현하면 나만 아는 명작이자 클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개봉 당시에 큰 주목을 받지 못했고 약간 B급 감성을 지향하는 시대를 앞서가는 영화였다. 주제는 매우 단순하다. '큰 사회 속에서의 개인들의 표류 그리고 관계' 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가장 큰 감명을 받았던 게 한강에 저렇게 큰 섬이 있나 하는 것이었는데, 그 후로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지날 때 마다 가운데 작은 섬들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지금부터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간단히 줄거리를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생활고에 못이겨 한강에 투신한 남자 김씨와 히키코모리 생활을 하며 온라인에서만 빠져사는 여자 김씨가 우연히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어 본 적도 없는 서로에게 빠져가는 과정이다.
먼저 남자 김씨는 한강에 뛰어들었다가 밤섬에 표류하게 된다. 쓰레기를 줍다가 어느날 짜파게티 봉지를 발견하게 되고 그 조리예 사진에 매료되어 이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살게 된다. 이 과정이 아주 흥미로운데 인류의 농사역사를 볼 수 있게 된다. 새똥을 긁어모아 밭을 갈아 심고 물은 비를 받아 마시고 소금은 본인 땀을 모아 먹는다. 일단 서울이라는 정말 큰 메트로폴리스안에서 이런 단절된 공간을 찾아내서 스토리를 만든게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지나가면서 밤섬을 볼 수 있지만 거기 가본 사람은 없다는 생각이 드니 군중 속에서의 고독이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남자 김씨가 처절하게 발버둥 칠수록 도시 한가운데서의 그의 발버둥은 나에게 더 와닿았다. 100m 거리에 바로 편의점이 있는데 그는 원시적 농사생활을 하며 옥수수를 키운다니! 심지어 남자 김씨가 옥수수 싹을 찾아 키울 때 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장마에 폭우가 와서 오리배가 떠날 때는 뭔가 뭉클했다...영화를 보면서 뭔가 굉장히 깊게 알 수 없이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아마 내가 이 영화를 재수할 때 봐서 그런 것이리라... 또 생각나나는건 남자 김씨의 내레이션이었다. "진화라는 건 점점 맛있어 지는 것을 뜻하나 봅니다" 라는 말이 굉장히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슬프게 느껴진 것은 자살할 용기도 없어 한강에서 뛰어내려 얼떨결에 혼자 살게 된 남자의 처지와 또 그 속에서도 어떻게든 자신의 거처와 물건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소유욕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느끼고 벗어나려고 하는 마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만족해버리는 본인의 처지를 스스로 아는 것이었다. 그는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해 도망쳤지만 또 자신의 소유들을 만들어 나가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되고 오리배를 놓아주며 이 상실감을 다시 겪게 된다. 알면서도 끊을 수 없는 그 오묘한 남자 김씨의 문제와 감정이 나를 좀 슬프게 만들었던 것 같다.
여자 김씨는 얼굴에 있는 흉터 때문에 바깥 생활을 하지 않는 히키코모리이다. 대신 그녀는 인터넷을 통해 남의 사진과 얼굴을 훔치며 인기를 얻어가는 추억의 싸이월드 유명인이다. 그런 생활에 나름 만족하고 완벽히 적응한 그녀는 어느 날 망원경으로 달 사진을 찍다가 남자 김씨를 보게 되는데, 이 사건이 그녀를 미치게 만든다. 그가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지고 그가 무엇을 먹는지 또 왜 그곳에 있는지 궁금한 그녀는 그에게 메세지를 전하기 위해 어렵지만 집 밖으로 나간다. 남자 김씨라는 존재가 사람 하나를 바꾸다니! 나는 려원이 처음으로 집을 나서는 순간이 정말 감동적이었다. 달밤에 무지개 우산과 헬멧을 쓰고 와인병을 들고 뛰는 그녀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또 여자 김씨는 가족과도 단절하였는데 남자 김씨가 옥수수를 열심히 키우는 것을 보고 그녀도 어머니에게 처음으로 무언가를 요구하게 된다. 옥수수 키트를 말이다! 옥수수 캔에 옥수수를 키우는 것은 좀 위트있었다. 처음으로 이렇게 쓰레기장 같은 집을 봤는데, 나름 편안해보이고 낭만있어 보여서 개인적으로는 부러웠다.
잔잔한 극 진행이 이어지면서 보는 사람들은 모두 미소를 짓게 된다. 내가 꽤 여럿에게 이 영화를 추천했는데 대부분 이런 영화가 있는지도 몰랐다며 굉장히 마음에 들어했다. 어쨌든 섬에 살던 남자 김씨는 청소하러 온 사람들에 의해 들키게 되어 쫓겨나고 여자 김씨는 이런 남자 김씨를 찾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가 버스에서 둘이 처음으로 만나며 영화는 끝이 난다.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만나자마자 끝나는 영화라니 이 얼마나 흥미로운가. 흔한 영화였다면 둘이 만나서 사랑하는 장면까지 담았겠지만 난 이 애매모호하고 열린 결말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표류하던 두 사람의 만남이 너무 반가웠고 좋았고 그 내가 싫어하는 민방위 소리도 꽤나 낭만적이었다. 그리고 또 현실적인 엔딩이라서 좋았다. 아마 남자 김씨는 그에게 남은 수많은 빚을 해결하지 못할 것이고 여자 김씨는 정상적으로 사회생활을 하기 어려울 것이지만 그래도 둘이 만나 서로를 보며 반가워하는 장면이 엔딩이라 좋았다. 다가올 불행이 수많겠지만 그래도 만나서 웃는 둘이 좋아 보였다.
그리고 정려원의 캐스팅은 조금 아쉽기도 했고 또 굉장하다고 생각했는데 아프고 힘 없는 연기 전문 배우가 여자 김씨 역할을 하니 매우 잘 어울렸지만 정려원이라는 배우 개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땐 전혀 발전이 없는 캐릭터라 아쉬웠다. 항상 하던 걸 또 하는 느낌이 많이 들어서 아쉬웠지만 이렇게 힘 없어 보이는 연기를 잘 해낼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만족스러웠다. 또 이 영화의 놀라운 점은 여자 남자 주인공을 제외하고는 비중있는 배역이 전혀 없다. 그나마 기억에 남는 배역이 자장면 배달부 정도...? 영화가 두 명에게만 매우 집중되어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고 또 정재영이 혼자서 극을 이끌어 가는 힘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 작은 섬에서 농사짓는 설정이 어쩌면 그렇게 재밌거나 흥미로운 설정은 아니지만 이를 전혀 지루하지 않게 이끌어가는 것은 분명 정재영이 가진 힘이라고 생각하고 또 나는 그가 항상 좀 악역이나 순둥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으로만 나온 영화만 봤기 때문에 이 배우의 새로운 면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느린 전개와 높은 집중력이 있는 영화였다.
아무도 모르는 기분 좋게 알 수 있는 나만의 명작, <김씨 표류기>였다.
+밤섬은 1968년 이전까지는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가, 1968년에 건설 자재를 얻기 위해 중앙부를 폭파한 이후 집단 이주되어 지금은 무인도이며 1999년부터 생태계 보호 구역으로 지정되면서 거주는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한다!
+사실 이 장면만 봐도 30% 정도는 봤다고 할 수 있다ㅋㅋㅋㅋ보다보면 짜장면 먹고 싶어진닼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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